놓음과 취함(압살롬 vs 다윗): 삼하 15-16장
압살롬은 이 반란이 백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각인시키고, 반란세력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고자, 천륜과 상식을 내버리고 다윗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관계를 한다(16:22).
극단적인 선택은 그만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. 반란의 배경이 아버지의 편애에 대한 깊은 불만었다면, 이 일의 배경은 아히도벨의 제안 때문이었다. 그는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세웠던 다윗이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책사였고, 압살롬은 실제 정치경험이 없는 만큼 그의 제안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(16:23). ‘아버지가 아히도벨을 통해 강대국을 이뤄냈다면, 최소한 나도 이와 함께 그 정도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...’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섬기지 않았던 압살롬의 입장에는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고 마음일 것이다.
암논의 편애로 영혼줄을 놓고 있던 다윗은 이 계기로 다시 잡게 된다.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했던 궤를 포기하고,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(15:25-26).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소망한다(15:31).
시므이의 저주에 권위나 감정이 아니라, “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을 수 있다”며 신중하게 대응한다. 지난 시간 자신의 범죄를 깨달았기에 감히 기대와 확신은 못하지만, 무거운 마음으로 주께 긍휼히 여김 받기를 소망한다(16:5-12). 이전에는 왕으로서 아히도벨을 의지하고 그 뜻을 따랐다면(16:23), 이제는 주의 자녀로서 주를 의지하고 그 뜻를 따르고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.
육안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자가 세상을 이끌고, 군중이 잘못된 세상을 바꿔 간다고 인식한다. 하지만 영안으로 보면, 그 자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고 이끌게 하신 분이 주님이고, 잘못됐다고 인식시켜 주시고 군중이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분이 주님이다. 또한 그 모든 것들을 한낱 꿈과 같이 만드실 수 있는 분도 주님이다.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압살롬의 행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. 하지만 수많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 역사의 정중앙에 있던 다윗 조차, 도대체 왜 죄에 휘둘리게 되는 것일까?
“성경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라, 나이기 때문이다. 예수의 예표라 여기는 다윗 조차 욕정, 권위, 자식사랑에 자유 할 수 없는 한낱에 인간에 불과하다. 그가 놀라운 일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를 선택했고, 그에게 맡겨줬고, 그가 할 수 있도록 인도해줬기 때문이다. 다윗이 대단한게 아니라, 내가 대단하기 때문에 이뤄진 것일 뿐이다.
수천년이 지난 지금, 나는 또 다른 일을 이루기 위해 너를 선택했다. 너의 작음만 보지 말고, 나의 큼도 함께 봐라. 그래서 네가 하는게 아니라, 내가 하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란다. 그래서 내가 쓰기 좋은 도구로 다듬어져서, 내 힘으로 내 일을 감당해 하기를 바란다. 그것이 내가 너를 택한 이유이고, 너를 지은 목적이란다. 그러니 네 생각과 네 마음을 비워내. 그러면 내 생각과 내 마음을 채워줄께.”
진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깨달음과 변화가 따르듯, 본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깨달음과 혁신은 따르게 될 것이다.